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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하우스coffee house

by cinema6 2024. 1. 26.

커피하우스coffee house

 


유럽의 커피하우스는 국가와 시대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사회적으로 카페인 문화를 전파한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유럽의 커피하우스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커피하우스의 기원

 

커피 하우스 또는 "qahveh khaneh"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시작되었다. 사교 활동과 지적 토론을 위한 모임 장소였으며,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는 음료인 커피를 즐겼다.
커피는 17세기에 유럽에 소개되었고, 1645년 베니스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커피하우스는  런던, 파리, 비엔나 등 유럽 주요 도시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유럽식 커피 하우스의 등장

런던 커피하우스

런던은 17~18세기 커피하우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런던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지 7년이 지난 1659년 토머스 러지(Thomas Rugge)는 “커피라고 부르는 터키 식 음료가 (런던의) 거의 모든 거리에서.... 팔렸다”고 하였다. loyd's 및 Jonathan's와 같은 커피하우스는 뉴스, 상업 및 지적 교류의 중심지로 인기를 얻었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수천을 헤아리는 커피하우스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이 같은 현상은 파리, 비인에서도 같았다. 커피하우스는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인기리에 그 수가 증가하였다.

 

런던 커피하우스들에 대한 전반적인 사료와 설명은 비교적 잘 정리되어있다. 우선 마크맨 엘리스(Markman Ellis)는 설명을 곁들인 방대한 원사료를 책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17-18세기 영국인들이 커피와 커피하우스에 관해 기록한 대부분의 자료가 담겨 있다. 브라이언트 릴리화이트(Bryant Lillywhite)는 17-18세기 커피하우스를 런던에 국한하여 소개하였다. 특히 여관(inn), 선술집(tavern)이 커피하우스로 전환하거나, 커피하우스와 겸업한 상황이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런던이나 영국을 벗어나 시야를 넓힌 설명에는 윌리엄 유커스(William Ukers)와 마크 팬더그라스트(Mark Pendergrast)의 책을 꼽을 수 있겠다.

 

커피하우스는 계몽주의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지적 토론과 아이디어 교환을 촉진했다. 철학자, 과학자, 작가들은 토론에 참여하고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이러한 시설을 자주 방문했다. 유럽의 커피하우스는 문학 토론과 독서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 볼테르나 루소 같은 작가들은 이러한 시설의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2000년 이후에 영국에서는 커피․커피하우스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보다는 특정 주제나 커피하우스에 한정하여 접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레반트 지역의 커피․커피하우스 문화에 대해선 더많은 자료를 참고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파리 카페cafe

 

'카페'라는 단어는 '아름다운 곳'을 뜻하는 신조어였다. 파리에서는 커피하우스가 문학적, 철학적 살롱으로 발전하여 작가, 예술가, 지식인의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커피가 새로운 음료로 폭넓게 확산된 것은 솔리만 아가 무스타파 라카가 태양왕(루이 14세)의 궁전에 터키 대사로 부임한 1669년 이후였다. 이러한 커피 판매는 파스칼의 직원이던 프란시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에 의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1686년에 최초로 설립된 Café de Procope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유명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탈리아인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오 데이 콜텔리가 설립한 르 프로코프는 지식인, 작가, 예술가들이 모이는  지적 담론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사람들은 초콜렛의 씁쓰레한 맛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고 茶로 간혹 입술을 적시고 있었던 까닭에 커피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철학자와 문학적 인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카페가 지적 교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볼테르, 디드로, 루소는 카페를 자주 방문하여 철학, 정치, 문학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사용했다.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있는 카페 드 라 레장스(Café de la Régence)는 체스 선수, 작가, 사상가들의 주요 만남의 장소였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데니스 디드로(Denis Diderot)가 주목할만한 후원자 중 하나였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카페는 혁명가와 정치적 토론을 위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카미유 데물랭이 바스티유 감옥을 탈취하기 위해 모자에 초록색 잎을 꽂고 출발한 곳도 바로 카페 드 푸아(Café de Foy)는 혁신적인 고객으로 유명했다.

19세기에는 생제르맹데프레의 카페 드 플로르 (Café de Flore) 와 레 두 마고 (Les Deux Magots) 가 문학 카페의 상징이 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등이 단골로 활동하며 문화 명소로 자리잡았다. 프랑스는 역사적인 문학적 장소부터 트렌디하고 현대적인 공간까지 다양한 카페를 자랑한다. 각 카페는 프랑스 카페 문화의 모자이크에 기여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과 변화하는 사회적 역학으로 인해 일부 전통적인 카페가 위협을 받고 있다.그러나 많은 카페는 역사적 매력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트렌드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적응하고 있다.



예술적 운동

 

벨 에포크 시대에는 카페가 예술 운동의 중심지로 등장했다. 르 샤 누아르(Le Chat Noir), 라 로통드(La Rotonde)와 같은 몽마르트르 카페에는 화가, 작가, 음악가들이 모여들었다.
몽파르나스의 르 돔(Le Dome)과 라 쿠폴(La Coupole)은 피카소, 헤밍웨이, F. 스콧 피츠제럴드 등 예술가들이 자주 찾는 유명 카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Café de Flore와 Les Deux Magots와 같은 카페는 계속해서 지식인과 실존주의 사상가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등 실존주의 작가들은 카페 철학의 전통을 이어갔다.
21세기에도 파리의 카페는 문화적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여가와 사람 구경, 프랑스 전통 페이스트리와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살롱'이 프랑스 문화사와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단순한 사교장이나 오락장 정도가 아니다. '살롱'은 남녀와 신분 간의 벽을 깬 '대화'와 '토론장'이었으며 또한 '문학공간'으로서 문화와 지성의 산실이자 중개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살롱의 대부분은 여성들이 개장하고 운영하였으므로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영역이 되었다. 살롱의 여주인들은 무료하고 폐쇄된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살롱을 개장했다. 따라서 살롱은 여주인의 취향에 따라 '순수한 문학 공간'에서 '사교 중심의 문학공간', '공연 중심의 문학공간', '토론 중심의 문학공간' 등으로 다양화되었고, 드나드는 손님들도 여러 부류도 나뉘어졌다. 

또한 살롱이 처음 개장되기 시작했을 때인 17세기와 달리 18세기의 살롱은 운영방법과 성격에서 많은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초창기의 살롱은 순수한 중세 무용담이 섞인 연애담, 달콤한 소설, 새로운 방향의 문학작품에 대한 설명회 같은 성격을 띤 모임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점차 철학과 정치에 대한 토론 및 활발한 사상의 교류의 무대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살롱문화'가 형성되게 된다.

 

'살롱'은 국내의 다양한 손님들만이 아니라 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드나들면서 국제적인 사교장, 문화 교류장, 외교의 장으로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살롱은 18세기 계몽사상을 창출하는 산실과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전령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살롱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 형성의 분수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커피하우스와 사회

 

커피하우스는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방된 비교적 민주적이고 포용적인 공간이었다. 후원자는 배경과 관계없이 토론에 참여하여 공동체 의식에 기여한다. 종종 정치적 토론과 논쟁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주요 역사적 시기에 여론과 정치 운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런던 증권 거래소는 상인들이 모여 사업을 하던 조나단(Jonathan's)과 같은 커피 하우스에서 유래되었다. 이들 커피하우스는 현대 금융시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커피하우스는 새로운 음료와 페이스트리를 선보이며 유럽 요리 문화의 진화에 기여했다. 카페 문화는 유럽 도시의 사회 구조와 얽히게 되었다.

 

커피하우스의 쇠퇴와 부흥

 


19세기에는 개인 클럽의 부상과 사회적 역학의 변화로 인해 커피하우스의 인기가 감소했다. 많은 커피하우스가 문을 닫거나 다른 시설로 전환되었다. 20세기 중반에는 모던한 에스프레소 바와 스페셜티 커피숍이 등장하면서 카페 문화가 부활했다. 이들 시설은 전통 커피하우스의 사회적, 문화적 요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품질의 장인 커피를 강조하는 "제3의 물결" 커피 운동이 목격되었다. 독립 커피숍이 확산되면서 커피 장인정신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오늘날 유럽의 커피하우스는 계속해서 공동체, 창의성, 문화 교류의 공간이 되고 있다. 이벤트, 미술품 전시, 다양한 활동을 주최하며 단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곳 이상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수 세기의 역사에 뿌리를 둔 프랑스 카페는 계속해서 프랑스 사회의 구성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적인 살롱부터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모임까지, 프랑스의 카페는 창의성과 토론,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키워왔습니다. 그들의 지속적인 유산으로 인해 이곳은 단지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곳이 아닙니다.

 


이상 유럽의 커피 하우스는 역사 전반에 걸쳐 문화적, 지적, 사회적 상호 작용의 풍부한 태피스트리 이해하고자 한다. 오스만 제국에서 시작하여 계몽주의 모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시설은 유럽 사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