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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의 발명

by cinema6 2024. 1. 24.

인쇄술의 발명

 

중세말에 유럽인이 발명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널리 사용되는 발명품이 있다. 바로 시계와 인쇄된 책이다.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발명인 활판 인쇄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구텐베르크 인쇄기

 

중세 후기(14~15세기)에는 손으로 쓴 원고가 서면 의사소통 영역을 지배했다. 대학의 성장과 함께 서적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서기관이 꼼꼼하게 텍스트를 복사하는 대본이 등장했다. 인쇄술이 발명하기 전에는 삽화를 위해 목판 인쇄와 판화를 사용했지만, 텍스트 전체를 복사하는 작업은 여전히 ​​수작업이었다. 카드놀이와 종교적 이미지는 유럽의 초기 인쇄물에 포함되었다.


독일의 발명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는 1440~1450년경 인쇄술의 발명으로 문자 커뮤니케이션에 혁명을 일으켰다. 구텐베르크의 주요 혁신은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개별 문자를 효율적으로 인쇄할 수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다양한 텍스트를 구성하기 위해 배열 및 재배열이 가능한 개별 금속 글자를 활용했다. 이 획기적인 발전으로 각 페이지마다 손으로 조각한 목판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에 잘 접착되고 종이에 깨끗하게 전사되는 내구성이 뛰어난 유성 잉크를 개발했다. 이로 인해 선명하고 또렷한 인상을 연출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첫 번째 주요 사업은 1455년경 구텐베르크 성경(42행 성경)의 인쇄였다. 활자로 인쇄된 이 성경은 획기적인 업적이 되었으며 서구 세계에서 인쇄된 최초의 주요 서적 중 하나로 간주된다.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은 스트라스부르, 베니스, 파리와 같은 곳에 인쇄기가 설립되면서 유럽의 다른 도시로 빠르게 퍼졌다. 지식의 전파가 지리적 경계를 초월하여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인쇄술 발명된 중요한 계기

 

활판 인쇄술의 발명은 획기적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중요한 계기는 1200년에서 1400년 사이에 유럽의 책 만드는 재료가 양피지에서 종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희귀한 가축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는 대단히 값이 비쌌다. 가축 한 마리에서 품질 좋은 양피지를 넉 장밖에 얻을 수 없었으므로,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200마리 내지 300마리의 양이나 송아지를 도살해야만 했던 것이다. 펄프로부터 얻어지는 종이는 가격을 실로 극적으로 하락시켰다. 중세말의 기록에 의하면 종이는 양피지의 1/6 가격에 팔렸다. 그러므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이 저렴하게 되었다. 문자 해독률이 점차 높아지면서 더욱 저렴한 서적을 요구하는 시장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1450년경의 활판 인쇄술 발명은 이러한 수요에 충분히 부응했다.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켜 준 이 발명은 불과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인쇄된 책의 가격을 필사된 책의 1/5로 하락시켰다.

 

인쇄술의 영향

 

책을 쉽게 구해볼 수 있게 되자 문자 해독률을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이제 책 문화는 유럽인의 생활 방식에서 일상적인 형태가 되었다. 기계식 프레스를 사용하여 균일한 압력을 가해 일관된 인쇄 품질을 보장한다. 이러한 기계화로 책 생산 속도가 대폭 향상되었다. 타이포그래피의 도입은 수기 복사의 힘든 과정에서 책의 대량 생산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책은 더 쉽게 접할 수 있고, 저렴해지고, 널리 보급되어 유럽에서 읽고 쓰는 능력 붐을 일으켰다.

 

1500년경 이후 유럽인은 모든 종류의 책들-종교 팸플릿뿐만 아니라 교본, 가벼운 읽을거리, 그리고 18세기에는 신문-을 구입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은 사사의 신속·정확한 확산을 보장해 주었다. 더욱이 혁명적 사상은 일단 그것이 수백 권의 책으로 추간 되기만 하면 더 이상 쉽사리 근절될 수 없었다. 그 결과 16세기의 가장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루터는 팸플릿을 인쇄함으로써 즉각 전독일에서 추종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루터는 후스처럼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책의 보급은 또한 문화적 민족주의의 발전을 자극했다.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내부에 지역 방언이 극심하여 같은 언어를 말하는 국민들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될 정도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의 중아 집권화는 방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국왕의 신하가 지방의 주민들과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명된 후에 유럽 각국은 나름대로 표준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니 표준어는 책에 의해서 균일하게 유포되었던 것이다. 

"표준 영어" King's English는 런던에서 인쇄되어 요크셔 또는 웨일즈로 보급되었다. 그 결과 커뮤니테이션이 향상되었으며, 정부 기능의 수행은 좀 더 효율적으로 될 수 있었다. 인쇄된 책의 가용성이 높아짐에 따라 교육이 민주화되었고 더 많은 청중이 지식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과 학자들이 더 넓은 범위의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대학은 번성했다. 타이포그래피는 르네상스 사상, 인문주의, 종교개혁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 종교 문헌, 학술 작품, 고전 문학 작품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로 보급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체의 개선, 인쇄 기술의 발전, 인쇄 산업의 확장과 함께 타이포그래피는 계속해서 진화했다.


이러한 기술 혁신은 책의 대량 생산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지식 보급에 깊은 영향을 미쳐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시대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 기간 동안 타이포그래피의 영향은 우리가 정보를 전달하고 접근하는 방식을 형성한 지속적인 유산이다.

 

Fust 및 Schöffer와 구텐베르크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사람은 고려인이다. 1234년 고려인은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했다.(서구인은 이 사실을 역사에 기록해 두지 않았다. 서구인이 알고 있는 금속활자 발명의 주인공은 구텐베르크일 뿐이다. 이 기술이 언제 유럽에 전파되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하게 알려진 사실은 1462년부터 구텐베르크, 푸스트, 그리고 쇠프가 개발한 마인츠 인쇄기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것이다.

 

요한 푸스트(Johann Fust)와 페터 쇠퍼(Peter Schöffer)가 개발한 마인츠(Mainz) 인쇄기는 인쇄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마련했다. 요한 푸스트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게 인쇄 사업을 위해 돈을 빌려준 금융가였다. 법적 분쟁 후 Fust는 Gutenberg의 인쇄 장비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 후 Fust는 숙련된 서기이자 구텐베르크의 전 수습생이었던 Peter Schöffer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마인츠 (Mainz)  인쇄기의 주요 특징

Fust와 Schöffer는 인쇄기의 원래 디자인을 발전시켜 기계 구성 요소를 개선했다. 인쇄기의 안정성과 효율성이 향상되어 인쇄 속도가 향상되고 품질이 향상되었다. 구텐베르크와 마찬가지로 푸스트와 쇼퍼도 인쇄기에 이동식 금속 활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혁신을 통해 활자 배열 및 재배열의 유연성이 향상되어 인쇄 과정이 간소화되었다. Fust와 Schöffer는 다양한 서체를 도입하여 인쇄에 사용할 수 있는 글꼴의 다양성을 확장했다. 이는 타이포그래피 발전의 초기 단계를 의미한다.
마인츠 인쇄기는 Fust와 Schöffer의 협력 하에 여러 가지 중요한 작품을 생산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1457년에 자신들의 출판 능력을 보여주는 조명 시편인 Psalterium Latinum을 인쇄했다. Fust와 Schöffer는 구텐베르크가 시작한 구텐베르크 성서의 제작을 계속했다. 1455-1456년경에 완성된 그들의 판은 종종 "가톨릭"으로 불리며 한 열에 42줄로 구성되어 있다.


Fust와 Schöffer의 마인츠 인쇄기는 인쇄 기술의 통합과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의 혁신은 인쇄가 생존 가능하고 영향력 있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인쇄 기술에 대한 Fust와 Schöffer의 공헌은 르네상스와 지식의 확산에 대한 더 넓은 이야기에 필수적이다. 마인츠 인쇄기는 구텐베르크의 원래 인쇄기와 함께 이후 유럽 전역에 걸쳐 인쇄기가 확산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포스트 푸스트 Peter Schöffer는 Fust가 사망한 후에도 인쇄 분야에서 계속 경력을 쌓아 이 분야에 추가적인 공헌을 했다. 마인츠 인쇄기는 후속 프린터를 통해 계속해서 발전하여 인쇄 기술의 역량을 더욱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인쇄술의 발명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시계와 책은 총이나 대양 항해용 선박 못지 않게 1500년 이후 유럽의 세계 제패에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계에 의해 습관이 길들여진 유럽인은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정밀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책의 보급은 커뮤니케이션을 향상했으며, 진보적 사상들을 유포시켰다. 일단 독서에 익숙해지 유럽인은 전 세계 어떤 다른 민족보다도 뛰어나게 서로 의견 교환을 했고 지적인 실험을 했다. 그러므로 1500년 이후에 유럽인이 전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Fust와 Schöffer가 개발한 마인츠 인쇄기는 인쇄 기술 발전의 중추적인 단계를 나타낸다. 구텐베르크가 세운 기초 위에 세워진 그들의 세련미와 혁신은 르네상스시대의 통신, 교육 및 지식 보급에 대한 인쇄기의 변혁적인 영향에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 좀 더 흥미로운 내용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