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해독자
몇몇 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상형문자, 설형문자, 그리고 크레타 선문자의 비밀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해독 불가능한 문자를 해독해 낸 그들은 문자언어의 비밀왕국을 파헤친 보물 추적자들이었고, 그들의 성공으로 마침내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해독의 열쇠의 키를 마련해 준 문자해독자의 삶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해 본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Jean-François Champollion)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신비를 풀어낸 선구적인 프랑스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의 놀라운 삶과 업적에 대하여 알아보자. 짧지만 충만한 생애로 알려진 로제타석을 해독하는 그의 획기적인 연구는 현대 이집트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어린 시절과 교육
1790년 12월 23일 프랑스 Figeac에서 태어난 Jean-François Champollion은 언어와 고대사에 대한 어린 시절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의 언어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뚜렷이 드러났고, 그는 수많은 언어를 빠르게 마스터했다. 샹폴리옹은 1804년 그르노블의 왕립 고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부터 상형문자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콥트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콥트어가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최근 형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로제타 스톤과 상형문자 해독
1799년 나폴레옹 원정 당시 이집트에서 세 가지 문자(그리스어, 민중문자, 상형문자)로 법령이 새겨진 석판인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동쪽, 나일강의 서부 지류에 위치한 라시드항 부근에서였다. 그것은 B.C. 196년에 제작되었다. 당시 열두 살 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왕을 기리는 칙령을 그리스어로 만들어 돌에다 새겨 넣은 것이었다. 텍스트는 그리스어로 쓰였지만, 그에 앞서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로 된 번역이 새겨져 있었다.
로제타 스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정복을 놓고 다투던 시절인 1801년 영국인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샹폴리옹은 1808년에 파리에서 로제타 스톤의 탁본을 구해 여러 해 동안 연구했다. 그는 상형문자로 쓰인 텍스트에는 두 개의 타원형이 있으며, 테두리 속에 들어 있는 이름은 그리스어 텍스트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모든 상형문자는 표의表意기호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샹폴리옹은 놀라운 직관력을 발휘하여 로제타 스톤 속의 기호는 사물뿐만 아니라 소리도 나타낸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1822년 파리에 있는 프랑스 문학학술원의 종신서기인 앙드레 다시에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고대 이집트인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직책, 이름, 성을 써넣는 데 사용한 음운 알파벳에 관한 이론을 설명했다. 상폴리 옹은 곧 그것을 로제타 스톤의 해독에 원용함으로써 그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했다. 그 돌은 고대 이집트 문자의 신비를 밝히는 열쇠가 되었다. 그는 상형 문자를 성공적으로 해독하여 문자에 표음 문자와 로고 문자 요소가 결합되어 있음을 입증했다. 샹폴리옹은 놀라운 직관력을 발휘하여 로제타 스톤 속의 기호는 사물뿐만 아니라 소리도 나타낸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콥트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타원형 테두리 장식 속에 들어 있는 기호의 의미를 해독해 낼 수 있었다.
이집트학에 대한 공헌
1824년에 샹폴리옹은 자신의 해독 방법과 발견을 요약한 "Précis du système hiéroglyphique"를 출판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이집트 상형문자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Champollion의 기여는 해독을 넘어서 이집트에서의 광범위한 현장 연구를 포함한다. 그는 조사를 실시하고 비문을 문서화했으며 고대 이집트 문화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샹폴리옹은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을 다른 돌에서 읽어 냈다. 로제타 스톤의 맨 윗분에 적혀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테두리 장식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잘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그는 나머지 텍스트를 해독할 수가 있었고, 상형문자가 표의기호뿐만 아니라 표음기호로도 구성되어 있음을 확실하게 정립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임명
Champollion은 전문 지식으로 인해 1831년에 Collège de France에서 권위 있는 지위를 얻었다. 그는 계속해서 이집트학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열정을 학생 및 학자들과 공유했다. 샹폴리옹은 획기적인 업적으로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비롯한 다양한 영예를 받았다. 그의 유산은 이집트학의 선구자로서 지속되고 있으며, 그의 해독 방법은 미래 학자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샹폴리옹의 언어 능력은 고대 이집트를 넘어 콥트어, 그리스어, 아랍어 등의 언어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다국어 전문 지식은 포괄적인 연구와 해석을 촉진했다. Champollion의 학문적 공헌에는 이집트 문법, 역사 연구 및 고대 이집트 언어에 대한 포괄적인 사전에 대한 작업이 포함되었다. Champollion은 특히 로제타스톤 해독에 기여한 영국 학자 Thomas Young과 학문적 논쟁과 경쟁에 직면했다. 분쟁은 때때로 Champollion의 업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비극적 이게도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1832년 41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했다. 그가 직면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집트학과 언어 연구에 미친 영향은 여전히 깊다.
설형문자의 해독으로 가는 대장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추리소설처럼 아슬아슬
설형문자의 해독은 1800-1830년 사이에 여러 명의 학자들이 고대 근동의 문자를 발견한 것에서 시작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설형문자 해독분야는 조금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계속 발전하였다. 학자들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명석한 분석력을 발휘해 세계의 기괴한 문자들, 예을 들면 스칸디나비아 룬 문자, 웨일스와 아일랜드에서 널리 쓰였던 켈트 문자체계인 오감 문자 등을 해독해 냈다. 해독되지 않은 문자의 수수께끼, 문자를 발명한 사람들의 재능, 그리고 문제 체계를 마침내 풀어낸 학자들의 천재성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신비로 가득한 문자의 역사는 또한 복잡한 변화의 역사이다. 기록하기 위해 6.000년 전부터 발달한 문자는 사색하고 고안하고 창조하고 존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문자는 '언어가 원활한 기능을 수행하자면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의 상형문자 해독은 고대 이집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지적 능력, 언어적 숙달, 과거의 신비를 밝히려는 헌신은 이집트학 분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이상은 문자해독자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