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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커피하우스

by cinema6 2024. 2. 18.

런던의 커피하우스 Coffeehouse

 

300년 전, 영국에서 커피하우스에 가는 것은 일종의 여행이었다. 개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지도 모를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한 여행인 것이다. 무엇보다 영국 곳곳에 있던 수천 개의 커피하우스에서 낯선 이와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권장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런던의 커피하우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파스쿠아 로제 Pasqua Rosee

 

런던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판 사람은 파스쿠어 로제이다. 파스쿠아 로제 Pasqua Rosee는 그리스 태상으로 영국 레반트 Levant사의 무역상 다니엘 에드워즈 Daniel Edwards의 하인이자 통역관, 회계담당자였으며 터키의 스미르나 Smyrna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음료를 터키인들은 '카베 kahve', 영국인들은 커피라 불렀다. 1651년 사업상의 이유로 터키를 떠나 차갑고 어두운 런던으로 되돌아올 때 에드워즈는 파스쿠아와 함께 런던으로 왔다.

 

1652년 파스쿠아는 세인트 마이클스 St. Michael's에 런던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오픈한다. 이 커피하우스는 현대와 같은 모습이 아니고 테이블을 갖추고 있지 않은 허름한 판잣집에 기원을 두고 있다. 1650년대 런던은 크롬웰 Cromwell 정원이 대도시 삶의 즐거움을 죄다 앗아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파스쿠아 커피하우스는 우울하고 음침한 도시에 떠오른 희망의 무지개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후 1658년 , 파스쿠아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계몽주의의 시작

 

런던시민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이게 된 것은 커피의 맛이 아니었다. 이는 커피가 주는 사교적인 효과였다.

시민들은 곧 대화와 토론 그리고 사색을 촉진하는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고, 뉴스와 가십이 넘쳐 나는 사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새로운 음료는 하루 일과에 마침표를 찍어 주는 육체적 정신적 활력소였으며, 영감을 이르는 좋은 통로였다.

 

1650년대에 등장한 검은 터키 음료인 커피는 카페인을 상징한다. 이러한 커피를 즐기려는 전통이 유럽의 벽촌僻村에 불과했던 영국을 계몽 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커피를 즐기는 재치의 도가니라 할 만한 커피하우스들은 런던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창의력과 혁신, 그리고 재치의 도가니라 할 만한 커피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커피하우스 정치인들"

 

한편 여성들은 커피하우스에 대해 반발했다. 남편들이 수다를 떨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커피하우스에서 죽치지 앉아 "왕자들을 퇴위시키고, 여러 왕국의 국경을 획정하며, 매우 정의롭고 공 펴 무사하게 유럽의 세력 균형을 맞추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뿐이다. 1674년에는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탄원서」라는 제하題下의 팸플릿이 발행되었다. 

 

 

최근 유행하는 이 형편없는 이교도의 음료, 커피의 과다한 음용이...
우리 남편들을 거세시켰고, 친절하고 멋진 우리의 신사들을 불구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남자들은 노인처럼 무기력해졌고, 이 불행의 열매를 들여온 사막처럼 불모의 상태에 빠졌다.

 

 

 1675년 찰스 2세가 왕실 칙령을 발표하며 커피하우스를 공격하자, 커피하우스는 진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26년 전 선왕先王의 참수를 잊지 못하는 찰스는 군중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는 생각만으로도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하지만 커피하우스의 폐쇄 반대 여론의 압박을 받은 찰스 2세는 커피하우스가 이미 대도시 삶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가 되어 버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가 시작될 무렵 런던에는 1000-3,000개 정도의 커피하우스가 성업하게 된다. 16세기경 커피가 콘스탄티노플에 처음 소개된 이래 이만한 커피하우스 붐은 세계  그 어디에서도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특색 있는 커피하우스

 

돈 살테로Don Saltero's 커피하우스

1695년경 '돈 살테로'로 알려진 제임스 솔터(James Salter)에 의해 설립되었다. 런던의 패셔너블한 지역인 첼시 체인워크(Cheyne Walk)에 위치해 있었다.
자연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고, 특히 자연의 새로운 종種들을 누구보다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신사 과학자들이 자주 찾았다. 한스 슬론 경이나 아이작 뉴턴 같은 과학자들은 커피를 마시며 과학계의 난제들을 즐겨 토론했다. 
컬렉션에는 박제 표본, 조개껍질, 화석, 광물, 식물 표본 및 문화 유물이 포함되어 있어 다양한 매력으로 방문객을 매료시켰다.

몰 앤드 톰 킹 Moll and Tom King 커피하우스

코벤트 가든에 위치한 이 커피하우스는 쾌락주의자들을 위한 윤락을 겸하고 있었다. 커피를 주로 판매하는 기존 커피하우스와 달리 초콜릿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고급 고객의 입맛에 맞춰 다양한 초콜릿 기반 음료와 별미를 제공했다

런던 사회의 엘리트 및 패셔너블한 구성원들의 사교 모임 장소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이곳을 자주 방문하는 귀족, 정치인, 예술가, 문학계 인사들이 사교 활동과 네트워킹을 즐기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라틴 Latin 커피하우스

1704년에서 1710년, 클럭컨 웰 그린에 있던 이곳은 학구적인 커피하우스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주인 준 호가스 John Hogarth가 손님들에게 라틴어를 쓰도록 강권했기 때문이다.

그는 "라틴어를 유창하게 쓰는 교양 있는 신사분들이 매일 오후 4시 이곳에서 만납니다"라고 광고를 낼 정도였다.

 

챕터 Chapter 커피하우스

세인트 폴 대성당 지근에 위치한 서적상에게 원고를 팔기 위한 작가들, 신문을 보는 손님들, 담임목사의 설교를 대필하는 부목사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슬로터 Slaughter 커피하우스

그림을 전시·논평·매매하던 곳으로 런던 예술계의 중심이었다. 체스를 두는 귀족들을 지켜보던 확률 분야 전문가들이나, 판화 작가인 윌리엄 호가스 등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옥에도 커피하우스가 있었고, 커피하우스에도 감옥이 있었다.

감옥 내 커피하우스는 그를 바깥세상과 이어 주는 중요한 통로였다. 플리트 Fleet 감옥 같은 곳에서도 감방 두 개가 커피하우스로 이용되었다. 한편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성벽이 가로지르고 있는 러드게이트Ludgate에는 감옥 역할을 하던 런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이처럼 다채로우면서도 활기 넘치는 커피 문화는 런던만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수적으로 유럽의 다른 나라 커피하우스와는 비교할 수 없었고 다양한 사회 계층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커피하우스를 우편 주소지로 쓰는 단골손님들의 개인 우편물들이 가득했다. 이상은 런던의 커피하우스에 대하여 알아보았다.